칼의 노래...필사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 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薄暮) 속으로 불려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저무는 해가 마지막 노을에 반짝이던 물비늘을 걷어가면 바다는 캄갘하게 어두워갔고, 밀물로 달려들어 해안 단애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어둠 속에서 뒤채었다. 시선은 어둠의 절벽 앞에서 꺾여지고, 목측(目測)으로 가늠할 수 없는 수평선 너머 캄캄한 물마루 쪽 바다로부터 산더미 같은 총포와 창검으로 무장한 적의 함대는 또다시 날개를 펼치고 몰려온다. 나는 적의 적의(敵意)의 근거를 알 수 없었고 적 또한 내 적의의 떨림과 깊이를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적의가 바다 가득히 팽팽했으나 지금 나에게는 적의만 있고 함대는 없다.
(중략)
목이야 어디로 갔건 간에 죽은 자는 죽어서 그 자신의 전쟁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내 몸의 깊은 곳에서, 아마도 내가 알 수 없는 뼛속의 심연에서, 징징징, 칼이 울어대는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등판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캄캄한 바다는 인광으로 뒤채었다.
- 칼의 울음 중 -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너무도 유명한 문장이지요.
당초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 라고 하지요.
작가의 고민 끝에 결국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바뀐 것이고요.
김훈 작가의 에세이집 <바다의 기별>에서 이와 관련하여 이야기합니다.
당시 치열한 전쟁 후에 부서진 배와 송장이 떠돌아 다니고 그 쓰레기로 덮인 바다에 봄이 오는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정서가 담긴 문장보다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문장이 필요했던 것이라는 작가의 설명입니다.
즉,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문장이고,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핀 객관적 사실에 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담은 문장이란 점에서
작가는 전자를 선택한거죠.
오로지 이 문장의 에피소드때문에 <칼의 노래>를 펼쳤습니다.
고백하건대, 내용보다 김훈 작가의 문장에 관심이 갑니다.
그래서 그 관심을 짧게나마 필사를 통해 표현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