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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칼의 노래...필사

 

칼의 노래 1 (2004년 9월 7일, 재개정판 18쇄 발행분)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 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薄暮) 속으로 불려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저무는 해가 마지막 노을에 반짝이던 물비늘을 걷어가면 바다는 캄갘하게 어두워갔고, 밀물로 달려들어 해안 단애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어둠 속에서 뒤채었다. 시선은 어둠의 절벽 앞에서 꺾여지고, 목측(目測)으로 가늠할 수 없는 수평선 너머 캄캄한 물마루 쪽 바다로부터 산더미 같은 총포와 창검으로 무장한 적의 함대는 또다시 날개를 펼치고 몰려온다. 나는 적의 적의(敵意)의 근거를 알 수 없었고 적 또한 내 적의의 떨림과 깊이를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적의가 바다 가득히 팽팽했으나 지금 나에게는 적의만 있고 함대는 없다.

 

칼의 울음 <칼의 노래1, 첫번째 챕터>

(중략)

 

목이야 어디로 갔건 간에 죽은 자는 죽어서 그 자신의 전쟁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내 몸의 깊은 곳에서, 아마도 내가 알 수 없는 뼛속의 심연에서, 징징징, 칼이 울어대는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등판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캄캄한 바다는 인광으로 뒤채었다.

 

- 칼의 울음 중 -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너무도 유명한 문장이지요.

 

당초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 라고 하지요.

작가의 고민 끝에 결국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바뀐 것이고요.

 

김훈 작가의 에세이집 <바다의 기별>에서 이와 관련하여 이야기합니다.

당시 치열한 전쟁 후에 부서진 배와 송장이 떠돌아 다니고 그 쓰레기로 덮인 바다에 봄이 오는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정서가 담긴 문장보다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문장이 필요했던 것이라는 작가의 설명입니다.

즉,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문장이고,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핀 객관적 사실에 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담은 문장이란 점에서

작가는 전자를 선택한거죠.

 

오로지 이 문장의 에피소드때문에 <칼의 노래>를 펼쳤습니다.

고백하건대, 내용보다 김훈 작가의 문장에 관심이 갑니다.

그래서 그 관심을 짧게나마 필사를 통해 표현해봅니다.